스포츠, 정치.음식 이바구
이순신이 임진왜란 한 달여 전 미리 정찰한 장소 본문
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고흥(高興)은 흥양(興陽)이었다. 이 고장을 지날 때마다 젊은 시절 아프게 읽었던 '태백산맥'이 옛 연인처럼 떠오른다. 벌교를 비롯한 근동이 소설 무대다.
벌교와 조성 남쪽, 득량만과 여자만을 끼고 있는 병목 같은 좁은 땅이 고구마 줄기처럼 고흥반도를 매달고 있다. 일본어 발음 흥양이 광양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행정구역 개편(1914년) 때 일제가 고흥으로 바꿨단다.
왜란 발발 전 점검 나선 이순신
1592년 2월(음력) 만화방창(萬化方暢)에 이순신이 흥양을 둘러보았다니, 그 길을 따라가 보려 한다. 양력 3월 29일∼4월 9일이니 꽃 만발하고 새 우짖는 봄날이다. 백야곶∼방답진성까지 여정 중 흥양에서 길이다.
4월 13일(음)에 임진왜란이 발발했으니, 실로 유비무환(미리 준비가 되어 있으면 걱정할 것이 없다는 뜻)이 무엇인지 보여 준 셈이다. 장군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단면이다.
유사시 대비태세를 점고하는 걸음이었으니 분명 성곽을 포함한 전선과 병선, 대포와 화약, 활과 화살 등을 살필 목적이었을 터다. 아울러 읍성에 들어 봄 풍경에 취해 "영주(瀛洲 ; 진시황이 불사약을 구하라 사신을 보낸 가상의 선경)가 이 같은 경치이던가?"라며 감탄했다니, 고흥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고 싶기도 했다.
여수 전라좌수영은 왜구를 방어하는 첨병 기지이자 남해안 중간이다. 철옹성으로, 좌수영 동쪽 해협에 왜를 방비하는 약 100m 제방을 둘 정도였다. 그러함에도 전라좌수영 군세가 5개 수군 군영 중 가장 빈약했다. 전라 좌수사에게 둔전과 5관(순천, 흥양, 보성, 광양, 낙안)·5포(녹도, 발포, 사도, 여도, 방답)를 다스릴 권한을 주었을 뿐이다.
이순신이 1591년 전라 좌수사로 부임했으니, 이후 장군의 행적으로 보아 유비무환 태세가 어떠했을지 미루어 짐작할 일이다. 이날의 순시는 5포 방비 태세를 점고하는 길이다. '난중일기'를 따랐다.
여도진성
<2월 19일 맑음>
(전략)…날이 저물어서야 이목구미(여수 화양면 이목리)에서 배를 탔다. 여도에 이르니 흥양 현감 배홍립과 여도 권관 황옥천이 마중 나왔다. 방비 상태를 일일이 살피고 조사했는데 흥양 현감은 내일 제사가 있어서 먼저 갔다.
원주도가 북쪽 바다를 막아주는 여도진은 바다로 밤톨처럼 툭 불거진 지형이다. 둥근 구릉 위 계란 모양 성은 현재 지적으로 가늠해 볼 수 있다. 세종 21년(1439) 도(都)만호영이었고 성종 22년(1491)에 둘레 412m, 높이 4.7m로 성을 쌓았다. 남·북문이 있었고, 북문 밖에 선소를 두어 병선, 전선, 사후선 등이 정박했다.
<2월 20일 맑음>
아침에 방비 상태와 전선을 점검해 보니 모두 새로 만든 것이었고, 무기도 어느 정도 완비되어 있었다.
여도진의 준비태세가 철저했나 보다. 임진왜란 때 여도만호 김인영의 활약이 대단해 이순신이 포상을 요청하는 장계를 올렸으며, 명량해전에도 참전했으나 신분이 미천해 승진에 불이익을 받는다. 우스운 일이다.
흥양 읍성
<2월 20일 맑음>
늦게 떠나 흥양에 이르니 좌우의 산 꽃과 들의 풀들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옛날에 영주가 있었다더니 이와 같은 경치였던가?
말을 타고 흥양 읍성에 이른다. 때는 봄날이다. 포근한 햇살 살랑이는 바람, 사위는 만물이 생동하는 봄빛 가득한 호시절이다. 이런 계절에 주월산과 봉황산 등 4가닥 산자락이 둘러싼 흥양은 선경이었으리라. 그러니 여기가 '영주'라며 감탄한다.
<2월 21일 맑음>
공무를 마친 뒤에 영저리가 자리를 베풀고 활을 쏘았다. 조방장 정걸도 오고 능성 현감 황숙도도 와서 함께 술을 마셨다. 배수립도 와서 술잔을 나누며 즐기다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신홍헌을 시켜서 전날에 심부름하던 군노, 사령, 급창 등에게 술을 나누어 먹이도록 하였다.
준비가 철저하다. 공무를 마치고 술자리를 열어 활을 쏘았다는 기록은, 관리를 칭찬하고 노고를 위무했다는 뜻이다. 읍성은 둘레 1,515m, 높이 3.7m∼4.7m로 상당하다.
남·북·서문을 두었으며 서문에 옹성이 있었다. 평지와 산성 혼용으로, 지금은 옥상마을과 옥하공원 사이 성벽 3백여m와 치성 1개소만 남아있다. 2개의 무지개다리 '고흥 홍교' 위로 성벽이 지났다.
남문에서 위로 뻗은 길 정점에 객사를 앉혔고 그 아래 관아와 내아를 두었다. 길 좌우로 열 지어 앉았던 관청 자리에 지금도 경찰서, 우체국, 교육청 등이 늘어서 전통 중심지임을 웅변하고 있다. 옛 고흥군청이 이전한 자리에 관아가 복원되어 있다.
녹도진성
<2월 22일>
아침에 공무를 본 뒤에 녹도로 떠났다. 황숙도가 동행했다. 먼저 흥양 전선소에 이르러 배와 기구 등을 점검하고 그 길로 녹도로 가 새로 쌓은 봉우리 위의 문루에 올라섰다. 경치의 아름다움이 고을 안에서는 제일이었다. 만호가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흥양 현감, 능성 현감, 만호 등과 함께 취하도록 마시고 대포 쏘는 것을 보았다. 촛불을 밝히고 한참 있다가 헤어졌다.
성곽과 배, 각종 무기와 군사의 훈련 상태 등을 점고하고 무척 흡족했나 보다. 아름다운 경치에 감탄할 여유마저 생긴다. 이때 만호가 유성룡 천거로 1591년 부임한 정운이다. 그에 대한 신뢰가 이때 무척 높아졌을 개연성이 높다.
대포 성능을 시험할 겸 술자리를 열어 위무한다. 촛불 아래 밤늦도록 여러 안건을 두고 긴 토론이 이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1592년 5월 전라 우수사와 함께 원균을 도우려 출전하기로 했으나 그가 오지 않자 이순신은 망설인다. 이때 정운이 "경상도 바다는 우리 바다가 아닙니까?"라며 이순신을 설득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순신과 함께 수많은 해전에서 선봉장으로서 전과를 올린다. 그해 8월 부산포해전에서 선봉으로 나섰다가 몰운대에서 왜군 저격에 순절하였다.
세종 때 녹도진이 설치되고, 성곽은 성종 21년(1490) 남향 구릉에 둘레 612m, 높이 3.9m로 쌓았다. 납작한 타원에 동서남북 4대 문을 두었고, 동문과 남문을 중심으로 배치된 가로망을 따라 객사와 관아 등이 배치되었다
바다에 면한 성안 가장 높은 곳이자 서문 터 자리에 '쌍충사'가 있다. 1587년 왜구와 싸우다 고흥반도 남쪽 손죽도에서 순절한 충렬(忠烈) 이대원을 기리는 사당에, 그의 죽음을 애석해하는 이순신의 청으로 충장(忠壯) 정운을 합사한다.
발포진성
<2월 23일 비와 거센 바람>
늦게 배가 출발해 발포에 이르자 바람이 세게 불어 배가 갈 수가 없었다. 간신히 성 머리에 배를 대고 내려서 말을 탔다. 비가 몹시 쏟아져 일행 모두가 꽃비에 흠뻑 젖은 채로 발포에 들어서니 이미 저물었다.
발포진성 가는 길에 풍랑이 일어 바다가 사나웠다. 발포는 36세(1580)의 이순신이 만호에 올라 처음 발령받은 곳이다. 전라 좌수사가 성안 오동나무를 거문고 만들기 좋다고 탐하자 이순신이 "오동나무 또한 관아에 있으니 나라의 것"이라며 막는다. 이 일로 강등되어 다른 곳으로 쫓겨간다. 발포진 옛 동헌 자리에 이를 기념하듯 여러 그루 오동나무가 자라고 있다.
<2월 24일 비>
가랑비가 온 산에 내려서 지척을 헤아리지 못했다. 비를 맞으며 길을 떠나 마북산 아래의 사랑에 이르렀다.
세종 21년(1439) 만호진이 되었고, 성종 21년(1490) 둘레 560m, 높이 4m의 성을 쌓았다. 현재 북∼서벽 약 165m가 복원되어 있다. 동·서·남 3개 문이 있었으며 지적으로 성 모양을 유추할 수 있다. 선소가 있던 바다는 매립되었다.
북쪽 산자락에 이순신을 기리는 사당 충무사가 앉았다. 이를 짓는 데에 사도진성 건물과 석재를 가져다 썼다고, 충무사를 관리하시는 분께서 귀띔해 주신다.
사도진성
<2월 24일 비>
배를 타고 노질을 재촉해 사도에 이르니 흥양 현감이 먼저 와 있었다. 전선을 점검하고 나자 날이 저물어서 그대로 거기에 머물렀다.
사도진은 해창만 어귀를 지키는 수군 기지다. 바로 앞 개구리 모양 와도를 집어삼키려는 뱀 모양이라 하여 蛇渡(사도)라 이름 지어졌다. 성종 22년(1491) 축성되었다. 종3품 무관직인 첨절제사 관할로 만호진 보다 위계가 높다. 성은 둘레 436m, 높이 4.5m로 서·남문이 있었으며 남문 밖 바다에 선소를 두어 배를 관리했다.
<2월 25일 흐림>
여러 면에서 전쟁에 관한 방비가 부족했다. 이에 군관과 색리들에게 벌을 주고 첨사를 잡아들이라고 벼슬아치를 보냈다. 이곳의 방비가 다섯 포구 가운데서 제일 잘못되었는데도 순찰사가 포상하라고 장계를 올려 죄상을 조사하지 못했으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바람이 세게 불어 배를 출항할 수가 없었으므로 거기에 머물렀다.
이때 첨사는 김완이다. 사도진 기지는 모든 면에서 낙제점이었던 모양이다. 그런 그를 포상하라 순찰사가 장계를 올렸으니, 이순신 심정이 어떠했을까. 근무지를 이탈한 그를 잡아들이라 명한다. 그러나 이후 김완은 이순신을 도와 여러 해전에서 공을 세운다.
이로써 전라 좌수영 1관 4포의 성곽과 군선, 전시태세를 꼼꼼하게 점고하였다. 선경의 고장 고흥이다. 4개의 팔영·운암·천등·마복산이 뿔처럼 치솟아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
고흥만과 해창만을 비롯한 대규모 매립으로 지도가 바뀌었어도, 수군이 사방을 방어하던 고흥반도 뼈대는 여전하다. 하늘과 바다를 향한 이 고을의 열망도 여전하다. 전남 고흥 나로도는 나로우주센터가 있기도 한, 우주로 향하는 통로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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